-낮선 걸음으로 걷는 밤_방초아 -큰창을 열어두고_안소연
			석다슬 《잠이 없는 눈동자》 전시 서문	

										   <낯선 걸음으로 걷는 밤>
																   
																	 경기도미술관 방초아 학예연구사
			
			잠 못 드는 밤, 꺼지지 않는 형광등 마냥 빛을 머금은 눈. 꿈인지 아닌지 모를 이 순간을 무게로
			친다면 몇 그램일까? 석다슬의 개인전 《잠이 없는 눈동자》는 <동공과 눈꺼풀>이라는 회화로 문을
			연다. 노란색, 연두색, 어느 색으로도 정의하기 어려운 색으로 반쯤 뜬 눈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다.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로 하나의 순간이 명명된다면, 반복되는 궤도 안에서 다가올 것에도 지나간
			것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익숙한 걸음으로 걷는 시간들도 마찬가지이다. 부재에
			관해 다루어온 작가는 무뎌진 삶의 굴레로부터 지금의 무게를 새로이 인식하게 하는 낯선 걸음을
			제안한다.
			
			작가의 작품들에는 서로 다른 요소들이 생소한 조합으로 만난다. 이 조합은 의식의 관념적인 흐름
			을 낯선 방향으로 유도한다. <정빙시간>은 개연성이 없어 보이는 아이스링크와 분수라는 두 이미지
			가 콜라주 된 영상이다. 물이라는 공통분모에도 불구하고 두 요소는 각각 오랜 시간에 걸쳐 정제된
			얼음과 치솟는 분수로서 상반된 정서적 에너지를 자아낸다. 서로 다른 두 에너지는 영상 안에서 소
			리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교집합을 이루는데, 얼음과 분수는 결국 한 끗 차이로 서로 대체될 수 있
			는 가능태이자 하나의 근원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과 연계된 <분수>는 신문지 위에 분수를
			그려 넣은 회화인데, 분수의 모습이 평면적이고 견고한 도상처럼 보이지만 눈물처럼 흘러내린 수채
			물감의 흔적을 동시에 담고 있다. 작품의 바탕이 된 일간지는 얇은 종이이지만 그 위에 여러 번 덧
			칠된 젯소가 무게감을 더한다. 매일 생산되고 버려지던 하루치의 가벼운 종이는 작가의 손길을 거
			쳐 오래 산다. 이러한 양가적인 특성들을 조합해낸 작가의 개입에서 그가 천착해온 부재의 주제가
			존재라는 주제와 불가분의 양가적 관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작가는 소중한 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경험한 이후로 부재에 관하여 탐구하기 시작했다. 종종 부
			재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며 당시의 시각적 잔상으로 소품이나 풍경만이 남아 그 순간의 무
			게를 담아낸다. 존재와 부재를 가르는 거창한 순간에 결국 가까이 잡히는 기억은 주변의 사소한 사
			물들일 것이다. <캄캄한 밤에 찾을 수 있는 것>에서는 철제 캐비닛에 고무장갑의 파편이나 조개껍
			데기, 냅킨으로 만든 조각, 껌 포장지 등 일상을 이루는 구체적인 사물들, 혹은 쉽게 버려지는 것들
			이 영예로운 별자리를 이루고 있다. 존엄한 별을 연기하는 오브제들의 배경에는 신성한 분위기를
			더하는 오르간 음악이 흐른다. 작가는 쉬이 얻어지고 버려지는 것들을 쉽지 않은 방식으로 가꾸어
			조명했다. 오브제들을 정성스레 다듬어 그것들의 일회적이고 기능적인 가치와 달리 본디의 존재가
			지닌 제각각의 미적인 가치를 드러냈다. 작가는 언제부터인가 도시 하늘에서 별을 바라보는 것이
			쉽지 않아졌다고 했다. 사실 별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공기가 탁해지고, 팍팍한 현실에 마음도
			탁해진 연유에서였다. 별을 바라보기 힘든 현실에도 주변의 오브제들을 활용하여 별자리를 그려낸
			것은 손에 닿기 어려운 것을 가까이 존재하게 하는 작가의 의지이자 애도의 태도로 볼 수 있다.
			
			작가가 만든 오브제들은 실재하는 별들, 즉 이데아에 대한 그림자인 셈이다. 별은 실재하지만 마치
			부재하는 것 같은 거리감을 지닌다. 실재하는 것이 부재하는 인상을 주는 것처럼 어쩌면 부재하는
			대상도 다른 세계에서는 감각으로나마 실재할지 모르는 것이다. 작가는 이 사물들로 하여금 지금과
			병행할 또 다른 지금을 발견하도록 인도한다. 실재와 부재를 가르는 실질적 경계, 그리고 감각으로
			서의 부재 사이를 사유하게 하는 그의 작품은 곧 지금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야를 열고 새로운 걸
			음을 딛게 한다. 아마도 그것이 별을 찾지 못해 더 이상 가슴에 별을 품지 못하는 우리에게, 별처
			럼 반짝이는 주인공이 되어보지 못한 채 버려지는 값싼 것들에 이 작품이 남기는 것일 것이다. 작
			가는 이처럼 일상의 구체적인 요소들을 작품에 반영한다. 눈, 분수, 나방, 모기 등 우리가 익히 알
			고 있는 대상들이지만 작품 안에서 이 요소들은 작가가 그려내는 부재라는 세계로의 상징적 단서가
			된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작품의 각 요소들을 공감의 대상이자 아니마(Anima, 영혼, 애니메이션의
			어원)의 존재로 여기며 마치 감정이나 생의 단계를 대리하는 것처럼 가다듬는다.
			
			<세 개의 점>은 여름날 잠 못 드는 밤에 들을 법한 모깃소리, 전류가 흐르는 소리 등 매우 구체적
			인 일상의 소리를 추상적 패턴의 화면과 조우시킨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전류 소리나 모깃소리, 즉
			운동 에너지의 파장은 모기 채에 의해 모기가 죽음을 맞이하는 사건으로 한순간 멎는다. 추상 화면
			은 학을 접는 종이의 배열로 만들어졌는데, 학종이의 무게처럼 미물의 무게이지만 한 생명이 끝을
			맞게 되기까지의 생의 파장을 시각적으로 현시한다. 작품의 요소들은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경계를
			비유한다. 스톱모션 기법이 사용된 애니메이션은 반전된 색면의 요철, 그리고 컷과 컷 사이의 투박
			한 연결 사이에서 지나간 컷들이 남긴 환영, 즉 부재하게 된 것이 존재했던 흔적으로 영상이 이어
			진다. 소리를 만들어내는 파장은 인간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시각적으로는 부재하나 청각적으로는
			존재한다. 존재와 부재의 경계가 명확히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의 탐구 과정은 마치 눈에 보이지 않
			는 공기를 증명해내는 여정과도 같아 보인다.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부재는 마치 진실의 영역처럼 실제 삶에서는 닿기 어려운 영역이다. 작가는
			부재라는 무한한 영역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거창한 관념이 주는 무력감을 주변의 것들을 새로이
			감각하는 유희적 경험으로 대체한다. 서로 다른 기호를 지닌 작품의 요소들은 작가의 손길을 거쳐
			새로운 조합을 이룬다. 작품이 유도하는 낯선 의식의 흐름 안에서 각각의 요소들은 원래의 자리에
			서 벗어나 새로운 상징성을 갖게 된다. 원래의 상징은 죽음에 이르지만 새로운 상징은 생(生)을 얻
			는다. 부재는 존재의 흔적이자 또 다른 가능성이다. 전시장에는 일상의 오브제들이 부재라는 이데
			아의 세계를 연극하는 그림자처럼 모여 하나의 몽타주를 이룬다. 아득한 밤의 꿈처럼 말이다. 반쯤
			뜬 눈으로 의식의 낯선 흐름을 따라 걸으며 부재의 세계를 상상해보자. 시계가 가리키는 숫자의 시
			간이 아닌, 실존하는 현재의 무게를 감각하는 시간 속에서 부재할 수 있는 것들은 곧 존재하는 것
			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낯선 걸음을 따라 지금을 이루는 것들에 공감하는 일은 곧 현재
			를 위로하는 일이자 새로운 지금을 여는 일일 것이다.


			
			
         
				
			 
			STRA-OUT: 남서정 석다슬 2인전
			[Middle Note Guide 전시 서문]	
			2023.6.1-6.24 씨스퀘어
			
			큰 창을 열어두고
				
			안소연
			미술비평가
				
			0.
			여름에는 소리도, 냄새도, 형태도, 색깔도, 더운 공기 속에 모든 것이 적당히 섞인다. 가로수의 
			짙은 이파리들과 길거리 술집에서 피우는 숯불 냄새가, 발에 차이는 돌멩이들과 아무데서나 자라
			나는 들풀들이, 세차게 내리는 여름비와 세차게 튀어 오르는 물가의 개구리가, (아무 일도 일어
			나지 않았어도) 하나의 사건처럼 기억된다. 큰 창을 열어두면 매미 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더위를
			몰고 온다. 서늘한 가슴에 땀이 흐르고, 방충망에 붙은 벌레는 보도블럭에 눌러 붙은 껌 자국처
			럼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Middle Note Guide”라는 제목의 전시를 생각하면서 긴 여름의 어떤 시간과 어떤 공간이 익숙하게
			떠올랐다. 향수의 (지속적인) 중간 향을 일컫는 “Middle Note Guide”라는 말은, 마침 봄과 가을
			사이에서 세찬 여름비와 긴 여름 해를 겪어내야 하는 이 계절에 대한 공감을 비약적으로 이끌어낸다. 
			어쩌면 이 전시의 제목보다는, 지난 전시에 관한 두 사람의 기록에서 막연한 접점을 찾았던 게 어떤 
			(뒤섞인) 물질들로 축적된 시간 혹은 시차였을 지도 모른다. <눌러 접은 여름>(2022)을 그렸을 때, 
			남서정은 긴 여름을 지나고 있었을 테다. 석다슬은 <물놀이 수평선>(2022)에서 청색 점프수트의 
			채도를 허벅지 높이까지 올려 놓고서는, 해변의 모래에 파도가 남긴 나이테처럼 여름 바다의 시간을
			가늠해 보고 싶었을 테다. 
			둘의 2인전 ⟪Middle Note Guide⟫는, 회화와 설치로 압축되는 두 사람의 작업에서 각자가 보내온 창작
			의 시간과 그것이 기억하는 “지속적인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말하자면, 하나의 개별적인 단어들이
			이어져 어떤 문장으로 연결되는, 말들의 주름처럼 계속해서 접었다 펼치며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거대한
			세계를 드러냈다 감추면서 어떤 순간들을 지속시킨다. 무더운 긴긴 여름 밤에 더욱 증폭되는 몸의 미세한
			감각들처럼, 큰 창문을 열어두고 세계의 모든 것에 귀 기울이는 낯선 존재들처럼, 둘의 전시는 먼 데서 
			서서히 다가오는 형상들과 관계 맺는 한 사람의 추상적인 시간을 담아낸다. 
	
			2.
			석다슬은 “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변하는 것, 오랜 시간에 걸쳐 변화하는 걸 관찰하고 탐구하길
			좋아한다”고 말한다.[*작가노트 참고] 예전 작업 중에 <모래 나이테>(2021)는 1채널 비디오 영상 작업
			으로, 1분 20초 간 스톱모션으로 움직이는 해변의 모래사장을 담아냈다. 카메라를 고정시켜 놓고, 그렇게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풍경 속에서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퇴적과 침식을 반복하며 현실의 찌꺼기들을 박제
			함으로써, 마침내는 거대한 역사로서의 시간을 환기시켜 놓는다. 말하자면 “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서서히 변하는 것”은 현재의 느린 시간 속에 꾸물거리는 소소한 것들에서 시작해 지극히 원대한 시간의 
			굴레 속에 축적된 바위 만한 존재를 떠올리게도 한다. 
			<포스트 모던 나방>은 어쩌면 그러한 말도 안되는 대비, 극단적인 대척점에서의 만남을 끌어내는 삶의 역설을 
			강조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 모던’이라는 말은 얼마나 거창한가. 나방은 개념도 사유도 필요 없다. 
			밤에 불빛을 좇아 날아다니는 나방은 그 윤곽선 조차 헤아리지 못할 정도로 희미하고 미약한 존재로서, 포스트
			모던이라는 단어의 무게에 비하면 턱없이 가볍다. 석다슬은 무모할 정도로 그 둘의 무게를 저울질 하기 위한 
			궁리를 모색하다가, 기이한 개체들을 현실에 등장시키기 시작했다. 포스트 모던 나방, 거창한 과거의 수식어를
			달고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시공간을 예언이라도 할 듯이 현재의 언캐니한 모순을 한껏 발산한다. 
			석다슬은 2021년부터 ‘포스트 모던 나방’ 연작을 시작했으며,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신작은 두번째 버전에 
			속한다. 첫번째 버전은 수직적으로 서 있는 일자형 형광등에 점토로 만든 나방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형태로,
			그의 말마따나 “정지된 나방과 시간의 지속을 보여주는 발광하는 빛의 조합”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삶과 
			죽음이라는) 기막힌 “시차”와 그 모순된 시간을 현실에 박제해 두려는 한 사람의 “쓸모없는” 노동/수행 
			앞에서 숱한 표정-혐오, 사랑, 불안, 슬픔, 분노 등-을 지우게 한다. 두번째 버전의 <포스트 모던 나방> 
			연작은 나방의 이미지와 LED 등이 하나의 형상을 구축하기 위해 동일시 되는 면모를 띤다. 그는 접었다 
			펼치고, 밀었다 당기며, 평형의 감각과 회전하는 감각처럼 어떤 힘의 균형 상태를 이루기 위한 길고 긴 
			노동을 감수한다. 그리하여 어떠한 뒤섞임 속에서 균형을 이루는 형상이 비로소 나타나게 될 때,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공간의 리듬에 귀 기울이게 한다. 
			 XXXX(2015) 드로잉은 석다슬의 초기 작업으로, 이번 전시에서 <포스트 모던 나방> 시리즈들과 하나의 
			 대구를 이룬다. 무명에 가까운 이 드로잉의 제목은 수많은 X의 함의를 포괄하면서, 그의 의도에 따라
			“삭제”와 “사랑”에 초점을 맞춘다. 두 개의 서로 다른 행위는 추상적인 “망설임”과 “감추기” 등의 
			의미를 교환하면서, 종이 위에 밤 하늘의 “달”을 좇아 그것에 대해 “아는 바”와 “보는 바” 사이의 
			괴리를 낱낱이 기록했다. 그의 설명대로, “책에서 배운 달의 모습과 바라보는 달의 모습의 괴리로 
			달의 외양은 점점 추상적으로 변하”는 국면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석다슬은 여기와 저기, 소소함과 
			원대함,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 과거와 현재 혹은 현재와 미래 사이를 왕복하며, 둘 사이의 
			낙차를 메울 수행적인 행위로서 지난한 노동을 감수하면서 “불가능한 형상” 만들기에 몰두한다. 
			이번 전시에서 거대한 구조물에 매달려 있는 XXXX 드로잉 연작은 그것과 등진 큰 창문과 실내의 
			인공적인 조명 사이에 자리잡고 있어, 빛을 좇아 날아든 밤의 나방처럼 검은 화면의 흐릿한 윤곽을 
			흐릿한 경계에 두고 있다.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석다슬의 <포스트 모던 
			나방>시리즈는, LED 등과 목재 구조물과 금속 선재로 조율된 일련의 균형 상태에 의해 미시적인 한 
			점으로의 한없는 몰입과 더불어 스펙터클하고 거시적인 우주적 세계로의 해방을 넘나드는 감각을 제시한다.
			정지되어 있으나 쉼없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나방의 날개, 거대한 힘에 의해 공전하는 달의 궤도가
			불확실하게 제자리를 서성이고 있는 흔적들, 석다슬의 작업은 이렇듯 서로 다른 두 개의 세계 혹은 서로
			다른 두 개의 감각이 만나는 어떤 접점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미지의 경계에 있을 법한 힘의 관계를 
			증명하거나 감각의 전환을 극대화 함으로써, 그는 일상성을 지배하는 견고한 리듬에 작은 균열을 일으키고 
			그것을 세심하게 조율한다. 
			_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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